왕릉이야기

목릉 [선조]

불dutl 2012. 6. 10. 19:26

<제14대> 선  조  1552년~1608년  연  하성군  재위;1567년7월~1606년2월{40년7개월}

목릉[동원이강릉]: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

 

 

선조는 중종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대원군과 하동부대부인 정씨 사이에서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하성군에 봉해졌다가 명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1567년 16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1년간 인순왕후가 수렴청정 하였다.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은 선조는 전후 복구작업에 심혈을 기울였으나 거듭된 흉년과 정치의 불안정으로 인해 큰성과를 이루지 못했다.처음에는 건원릉 서쪽 다섯번째 산줄기에 안장되었는데 이곳에 물기가 있고 불길하다 하여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선조는 변덕이 심하고 냉혹하고 무능한 군주였으나 놀랍게도 그의 시대에 조선의 명신들이 수없이 배출되었다.퇴계 이황,율곡 이이,정철,이산해,유성룡,이덕형,이항복,이원익등 문신들과 권율,이순신 같은 무신들 그리고 어의 허준까지 수많은 충신들이 배출되었다.선조는 10명의 부인과 14남11녀의 자녀를 두었다

 

 

 

* * *원비  의  인  왕  후* * * 1555년~1600년

 

본관 반남  아버지 번성부원군 박용순과 어머니 이씨 사이에서 1555년[명종10] 4월에 출생하였다

1569년[선조2] 15세의 나이에 왕비로 책봉되어 가례를 올렸다.하지만 선조는 가례를 올리기 전에 소주방 나인이었던 김씨와 접촉하였다.의인왕후 박씨는 아이가 생기지 않았고 나인 김씨가 임해군,광해군을 낳아 소용의 품계를 받았다.선조의 승은을 입은 후궁들 사이에는 자신의 아들이 세자로 책봉받기위해 각축전이 벌어졌다.후덕한 성품인 의인왕후는 후궁들의 아이들을 보살피고 그들에게도 관대하여 살아있는 관음보살이라고 불리었다.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는 인빈김씨와 피난을 떠나고 의인왕후 박씨는 홀로 피난길에 올랐다.선조의 박대로 마음고생이 심했으며 임진왜란이 끝난후 병을얻어 1600년[선조33]6월 소생없이 승하했다.

 

 

* * *계비  인  목  왕  후* * *1584년~1632년

 

본관 연암  김재남의 딸이고 영창대군의 생모이다.

1602년[선조35] 18세에 51세인 선조의 계비로 책봉되었다.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광해군 대신 영창대군을 추대하려던 소북의 유영경 일파가 몰락하고 대북인 정인홍,이이첨등이 득세하였다.

1612년[광해군4] 이들의 사주를 받은 윤인에게 살해될뻔 했으나 박승종의 저지로 목숨을 보전하였다.

1613년 대북파의 모략으로 어린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되고 아버지 김재남은 사사되었다.

1618년 서궁에 유폐되고,대북파는 폐모 정청 사건을 일으켜 왕대비의 지위까지 위협했다

서인들이 인조반정을 일으켜 대왕대비가 되었다.소생으로 1남1녀를 두었다

 

<목릉의 신도>정자각에서 인목왕후 능까지의 사초지에 신도가 그림같이 길게 이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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