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이야기

선릉 [성종]

불dutl 2012. 6. 10. 00:43

<제9대> 성  종  1457년~1494년   혈  자산군   재위1469년11월~1494년12월{25년1개월}

선릉[이강릉]:서울시 강남구 삼성2동 [선정릉]

 

성종은 작은아버지 예종이 세상을 뜨자 3세였던 제안대군[예종의아들]과 병약했던 형 월산군[당시15세]을 제치고 세조의 비 정희왕후의 명으로 13세의 어린나이에 왕위에 올랐다.7년간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다.성종시대에는 태평성대였다.조선초기 선대왕들이 피비린내를 풍기며 지킨 왕권을 가장잘누린 축복받은 왕이었으나 여색을 가까이 해 연산군대 피바람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성종과 폐비윤씨 사이의 아들이 제10대 연산군이며 포악한 연산군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 중종[진성대군]이 성종과 정현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성종은 사림파를 발탁하여 정계에 진출시켰고 1474년 경국대전을 반포하는등 조선 건국이래 정비되어온 문물과 제도를 완성하였다.창경궁을 창건하고 국조오례의를 만들어 유교 예법을 넓혔다

1494년 창덕궁 대조전에서 보령38세로 승하했다.3명의 왕후와 9명의 후궁에게서 16남12녀의 자녀를 두었다

 

 

* * *계비  정  현  왕  후* * * 1462년~1530년

 

본관 파평  윤호의 딸,존호-자순 화혜  휘호-소의 흠숙  1473년[성종4] 숙의에 봉해지고 1479년 연산군의 생모인 왕비 윤씨가 폐출되자 다음해 11월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중종[진성대군]과 신숙공주를 낳았다.중종25년[1530]에 보령69세로 승하했다.

 

 

* * *원비  공  혜  왕  후* * *1456년~1474년

순릉: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리 산15-1 [파주삼릉]

 

본관  청주  한명회의 넷째딸로 순릉과 마주보고있는 공릉의 장순왕후와 자매지간이다

1467년[세조13] 의경세자[덕종]의 둘째아들 자산군[성종]과 가례를 올리고 효심이 깊은 예종은 세조의 장례를 치르면서 건강을 잃어 14개월만에 승하했다.이때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은 겨우 3살에 불과했고 

15세의 월산군은 병약하여 자산군[성종]이 왕위를 계승함에 따라 왕비로 책봉되었다

공혜왕후는 어린나이에 궁에 들어와 삼전[세조비 정희왕후,덕종비 소혜왕후,예종계비 안순왕후]의 귀여움을 받았다고 한다.왕비로 책봉된지 5년만에 후사없이 승하한 공혜왕후는 왕비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세자빈의 신분으로 돌아가신 언니 장순왕후의 공릉에 비해 구성물이 더 많다.

 

 

* * *회  묘* * * 1445년~1482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37-1 [서삼릉]

 

폐비 윤씨는 판봉상시사 윤기견의 딸이며 연산군의 생모이다.

1473년 후궁으로 간택되어 숙의에 봉해졌고 성종의 총애를 받다가 1474년 공혜왕후 한씨가 죽자 왕비로 책봉되었다.정희왕후는 폐비윤씨가 왕비로 선발된 이유를 평소 윤씨는 허름한 옷을입고 검소한것을 숭상하며 하는일마다 정성과 조심성있게 행동하는 점들이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왕비로 책봉되던해에 세자 연산군을 낳았다.투기가 심해 성종을 난처하게 하는일이 잦았으며 1477년에는 극약인 비상을 숨겨 두었다가 발각되어 빈으로 강등될뻔 하였으나 성종의 선처로 무마되었다

1479년에는 규방 출입이 잦고 자신을 멀리한다하여 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냈다.이일로 성종과 모후 인수대비의 진노를 사 폐비가 되어 사가로 쫒겨났다.친정으로 간뒤 바깥세상과 접촉이 금지되었다

세자의 친모를 일반백성과 같이 살게해서는 안된다는 상소가 이어져 내시와 궁녀들을 시켜 알아보라 했으나 인수대비와 성종의 후궁 엄씨,정씨등의 명을 받은 나인과 내시들은 왕에게 전혀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허위보고를해 사약을 내려 그녀를 사사시켰다.성종은 폐비가 된 윤씨를 그리워 한적이 없다고 한다.폐비윤씨를 사사한 다음날 윤씨의 모친 신씨와 윤씨형제들도 모두 귀양보냈다.

세자를 생각하여 윤씨묘에 "윤씨지묘"라는 묘비명을 내리고 장단도호부사로 하여금 절기마다 제사를 지내게했다.성종은 자신이 죽은뒤 100년까지 폐비문제에 관해 논하지 말라는 유명을 남겼다

그러나 연산군은 이를 어기고 결국 갑자사화를 일으켰다.연산군 즉위후 숨어있던 신씨가 연산군을 찾아가 그피묻은 한삼자락을 건네주며 폐비의 한많은 속사정을 고해바쳤다,진실을 알게된 연산군은 폐비가 된 자신의 어머니를 다시 복위시키려 하지만 할머니 인수대비와 조정의 반대에 부딛치자 마음에 들지않는 대신들을 모두죽이고 할머니 인수대비까지 핍박했다.1497년 그녀의 묘를 개장하고 1504년에는 성종의 유명을 어기고 제헌왕후에 추승했으며 묘도 회릉으로 개칭했다.연산군이 폐비 윤씨의 능을 품을회,돌이킬회 써서 회릉이라 한것은 그리운 어머니품에 안기고 싶은 사모곡이었을까.

폐비 윤씨는 성종보다 12살 위였고 시어머니 소혜왕후와는 8살 차이가 난다고 하나 정확하지는 않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윤씨의 관작도 추탈된뒤 다시는 신원되지 못했다.

폐비윤씨는 세자를 낳은 왕비이면서 투기심과 부덕함으로 폐비당했다가 결국 참극을 당했고 폐비윤씨사건은 연산군의 폭정으로 이어져 급기야 조선조정에 엄청난 살생극을 불러 오고야 말았다.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고부갈등의 희생자가 폐비윤씨이다.회묘는 본래 동대문구 회기동에 있었으나 1969년10월25일 경희대학교 공사때 이곳으로 이전했다.현 경희의료원 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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