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대> 태 조 1335년~1408년 성계 단 재위;1392년7월~1398년9월{6년2개월}
건원릉: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
이성계는 이자춘[추존 환조]와 의혜왕후 최씨 사이에서 2남으로 태어났다.
고려의 뛰어난 무장이었던 이성계는 1392년7월17일 개경[지금의 개성] 수강궁에서 왕위에 올라 새왕조를 열었다. 이듬해2월 국호를 조선이라 정하고 1394년10월 도읍을 한양으로 옮겨 조선왕조의 기틀을 이루어 놓았다.명나라와의 친선을 도모하기 위해 사대정책을 썼고 농본주의를 통해 농업을 장려했다.
그러나 아들들의 권력 다툼이 화를 불러 일으키자 정치의 뜻을 버리고 고향 함흥으로 돌아갔다.말년에는 불도에 정진하다 태종8년 창덕궁에서 74세로 승하했으며 묘호를 태조라했다.
태조는 생전에 계비 신덕왕후와 함께 묻히기를 원해 신덕왕후 능인 정릉에 자신의 묏자리를 축조해 놓았다.그러나 태종은 부왕의 유언을 따르지않고 신덕왕후의 정릉을 도성밖으로 이장하고 태조의 능을 지금의 자리에 조성했다.태조사후 고향 함경도 영흥에 묻히길 훤했으나 정종이 너무 멀다하여 양주땅[지금의동구릉]에 능을 만들고 그대신 고향에서 흙과 억새풀을 가져다가 봉분을 만들었다.
지금도 봉분에 억새풀이 무성히 자라있다.보통 능호는 외자로 하지만 건원릉만 두자리다.건원릉은 고려 왕릉중 가장잘 정비된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 제도를 기본으로 조성하였으며 이후 조선왕릉 제도의 표본이 되었다.기본 능재는 현정릉을 따르고 있으나 석물의 배치와 장명등의 조형등 세부적으로는 새로운 양식의 도입으로 새왕조가 시작 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봉분 주위로 곡장을 두르는 방식은 조선시대의 능제에 새롭게 추가된 것이며 석물의 조형은 남송 말기의 중국풍을 따르고 있다.
태조가 조선을 건국한 7월17일이 현 제헌절이다.4명의 부인과 8남5녀를 두었다.
<일화> 세자책봉에 불만을 품은 이방원[태종]이 1.2차 왕자의 난을 통해 신덕왕후 소생인 두아들을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정치에 뜻을 잃어버린 태조는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2년뒤 정종의 뒤를이어
태종이 즉위하자 태상왕이 된 태조는 고향인 함흥으로 돌아갔다.이때 태종이 문안을 위하여 보낸 차사들이 함흥만 가면 돌아오지않아 "함흥차사"라는 말이 생겨났다.한번 가기만하면 깜깜무소식이라는 뜻으로 심부름꾼이 가서 소식이 없거나 회답이 더디올때 쓰이는 말이다.
<건원릉 비각> 신도비와 비석이 나란히 서있다
* * *정비[향처] 신 의 왕 후* * *1337년~1391년
재릉:개성시 판문군 상도리 [북한]
본관 인변 안천부원군 한경의 딸,어머니는 평산신씨,1337년 출생하여 15세때 17세인 이성계와 가례를 올리고 함흥 운전리에서 살았다.6남2녀를 낳고 위장병이 악화되어 조선개국1년전인 1391년 55세로 사망하였다.1392년7월17일 조선개국 다음날 절비로 추존되어 능호를 재릉이라 칭하였다.
이후 개풍군 상도면 풍천리에 봉릉하였다.1398년11월 한씨소생 2남 방과 정종에 의해 신의왕후로 추존되었고 1408년[태종8]에는 태종에 의해 승인 순성 신의왕태후로 시호를 높였으며 1683년[숙종9]에 신의왕후로 다시 격하 시켰다.
* * *계비[경처] 신 덕 왕 후* * * 1356년~1396년
정릉:서울시 성북구 정릉동 산87-16
본관 곡산 황해도 곡산부 상산부원군 강윤성의 딸로 1356년에 출생했다.조선의 첫번째 왕비이다
태조 이성계는 고려시대의 풍습에 따라 향처와 경처를 두었는데 강씨는 경처였다
강씨는 조선개국과 함께 현비로 책봉되었다.극진히 사랑했던 현비가 갑자기 승하하자 태조는 도성안에 왕릉터를 정하는것은 물론 강씨 봉분 우측에 자신의 봉분인 수릉까지 정하고 수릉의 능호를 정릉으로 하였다.[현 영국대사관 자리] 조선왕릉 첫능호인 정릉에서 오늘날 중구 정동이 유래되었다.
잘조성된 정릉은 태조의 원비 신의왕후의 다섯번째 소생인 태종이 즉위하면서 푸대접을 받았다
태종은 능역 100보 근처까지 주택지로 허락하여 세도가들이 정릉숲의 나무를 베어 저택을 짓고 광통교[현광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능의 석물중 방풍석을 광통교 복구에 사용하였으며 그밖의 목재나 석재들은 태평관을 짓는데 썼다.태조 승하후에는 도성밖 양주 사을한록[지금의 정릉] 자리로 능을 옮겼다
또 태종의 어머니 신의왕후를 유일한 정비로 태조와 함께 그신주를 종묘에 부묘하고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격하시켰다.그래서 정릉은 종묘에 부묘되지않아 수백년간 왕후의 능이라기보다 주인없는 무덤으로 방치되다가 1669년[현종10] 260년만에 복구되었다.신덕왕후라는 존호를 되찾아 종묘에 처음 배향 되던날 정릉 일대에 많은비가 쏟아졌는데 이때의 비를 신덕왕후의 원을 씻어주는 비라하여 "세원지우"라고 불렀다한다.태조가 정릉을 조성한후 흥천사라는 절을 지어 극락왕생을 빌었는데 지금은 불타 없어지고 종만 남아 떠돌다가 경운궁 광명문속에 전시되고있다. 신덕왕후는 2남1녀를 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