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이야기

홍릉[고종]

불dutl 2012. 6. 2. 23:41

<제26대> 고 종 황 제  1852년~1919년  명복  희  익성군  재위;1863년12월~1907년7월{43년7개월}

홍릉[합장릉]: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141-1 [홍유릉]

 

 

고종은 정조의 이복동생 은신군에게 양자로 입적한 남연군의 4남흥선대원군과 여흥부대부인 민씨 사이의 둘째아들이다. 1863년[철종14] 철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조대비의 전교로 12세에 즉위하였다.

나이가 어려 조대비가 수렴청정 하였으나 대정을 협찬하게 한다는 명분으로 정권은 대원군에게 넘어가 이로부터 대원군의 10년 집정시대가 열렸다.척신 세도정치의 배제,붕당 문벌의 폐해 타파,당파를 초월한 인재의 등용,의정부의 권한 부활에 따른 비변사의 폐지 및 삼군부의 설치,한강 양화진 포대 구축에 따른 경도 수비강화,양반으로 부터의 신포징수,양반 유생의 발호 엄단등은 고종초기 10년동안 대원군이 이룩한 치적이다.그러나 경복궁 중수에 따른 국가재정의 파탄,악화인 당백전[화폐]주조와 민생의 피폐,과중한 노역으로 인한 민심의 이반과 소요,가톨릭교 탄압에 따른 8000여명의 교도 학살,통상수교 거부정책,병인양요,신미양요등 어두운 정치적 자취를 남기고 1873년[고종10]11월 명성황후의 공작에 따라 대원군이 섭정에서 물러나자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게 되었다.이로부터 정권은 민씨일문[민승호,민경호,민태호]의 세도정치가 다시 시작되었다.이때부터 고종은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세력다툼 속에서 국난을 헤쳐 나가야 했다.

1875년 윤요호 사건을 계기로 통상수교 거부정책을 버리고 일본과 병자 수호조약을 체결,근대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개국과 함께 새로운 문물을 접하게 되자 개화당이 대두,조정은 개화,사대당[사대수구당]의

격심한 알력속에 빠졌다.1881년 신사유람단을 일본에 파견하여 새로운 문물을 시찰하게 하고 군사제도를 개혁,신식훈련을 받은 별기군을 창설하였으나 신제도에대한 반동으로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 개화,수구 양파는 피비린내나는 싸움을 벌이게 되어 1884년 갑신정변을 겪고 고종은 개화당에 의해 경우궁,계동궁 등으로 이어하였다.한미,한영 수호조약 체결,1885년 청일간의 텐진조약 체결,일본이 한반도에 발판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1894년 동학 농민운동이 청일전쟁을 유발하여 일본이 승리하자 친일파가 대원군을 영입하자 김홍집등 개화파가 갑오개혁을 단행,일본이 본격적으로 내정을 간섭하였다

최초의 헌법 홍범14조를 선포하고 청나라의 종주권을 부인하고 독립국으로 행세하는듯 하였으나 일본의 내정간섭은 더욱 심해져 관제를 일본에 준하여 개혁하고 8도를 18도로 개편하였다

그러나 3국간섭으로 일본이 랴오둥 영유를 포기하여 국제적 위신이 떨어지자 민씨일파는 친러로 기울어 친일내각을 무너뜨리고 이범진,이완용등을 등용하여 제3차 김홍집 내각을 구성하였다.

일본공사 미우라고도가 1895년8월 대원군을 받들고 일본인 자객을 앞세워 경복궁으로 들어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고종에게 강압하여 친러파 내각을 물러나게하고 유길준등을 중심으로 제4차 김홍집 내각을 수립했다.종두우체사무,단발령,양력사용,도형폐지등은 이해에 제4차 김홍집 내각에 의해 이루어졌다

1896년2월 러시아공사 베베르의 계락으로 고종과 세자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이 있자 김홍집등 개화파 인사가 살해되고 다시 친러 내각이 성립되었다.

1897년2월25일 러시아와 일본의 협상에 따라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8월에는 연호를 광무라 고치고 10월에는 국호를 대한,왕을 황제라 하며 고종은 황제즉위식을 가졌다.

1904년[광무8]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요구로 고문정치를 위한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이듬해 한성의 경찰치안권을 일본헌병대가 장악하고 이해11월 제2차 한일협약인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겼다.이에 우국지사 민영환,조병세,홍만식등은 자결로서 항의 하였지만 1906년2월 일본이 통감부를 설치하여 본격적인 대행정치 체재를 갖추었다.1907년 제2회 만국평화 회의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자 고종은 밀사 이준등을 파견하여 국권회복을 기도 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실패,오히려 이밀서 사건으로 일본 협박에 의해 황태자[순종]에게 양위하고 퇴위하여 순종황제로 부터 태황제의 칭호를 받고 덕수궁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1919년1월21일 일본인에게 독살된것으로 전해진다

고종의 재위44년은 민족의 격동기로서 실질적으로 국운과 명운을 함께하며 양위3년후에는 나라를 빼앗기는 비운을 맞았다.고종이 승하하자 지금의 자리에 고종의 능을 만들면서 청량리[현 홍릉수목원]에 있던 

명성황후의 능을 옮겨와 합장하였다.9명의 부인과 궁인2명에게서 9남7녀의 자녀를 두었다

고종의 장례기간에 3.1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 * *명  성  황  후* * *1851년~1895년

본관 여흥민씨 아명-자영  1851년[철종2] 경기도 여주에서 영의정에 추증된 민치록의 딸로 태어났다

8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살다가 16세에 흥선대원군의 부인 부대부인 민씨의 추천으로 왕비에 간택 책봉되었다.그러나 궁인 이씨에게서 완화군이 태어나자 이를 기뻐하는 흥선대원군과 대립,흥선대원군의 반대파를 규합하면서 민씨 척족을 정부 요직에 앉히고 세력기반을 착실히 다졌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신변이 위태롭게 되자 궁궐을 탈출 화개동[현 상주시 화개동] 윤태준의 집을 거쳐 충주,장호원등으로 옮겨 다니며 피신생활을 했다.이와중에 대원군이 중전의 국상을 선포하자 윤태준을 고종에게 밀파하여 자신의 건재를 알리고 청나라에 자원을 요청하게 하였다.

청나라 군대의 출동으로 군란이 진압된뒤  흥선대원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다시 잡았다

1884년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켜 실각하자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만에 개화당 정권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이후 친일 내각이 득세하고 흥선대원군 재등장으로 갑오개혁이 시작되자 이번에는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세력을 추방하려고 하였다.이에 일본정부의 사주를 받은 주한 일본공사 미우라고도가 1895년8월20일[양력10월8일] 일본낭인을 궁중에 잠입시켜 경복궁 옥호루에서 그녀를 난자시해하고 시신은 궁궐 밖으로 운반 소각하였다. 이사건이 바로 을미사변이다.

하지만 최근 시해장소가 옥호루가 아니라 경복궁 장안당과 곤령합 사이에있는 마당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다.그뒤 폐위되어 서인으로 강등 되었다가 같은해10월 복호되었고 1897년[광무1] 명성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그해11월 국장으로 청량리밖 홍릉에 묻혔다.

그러나 1980년대이후 명성황후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일어나면서 을미사변이 미우라고도의 단독범행,그의 측근들의 과잉충성 범행,흥선대원군과의 권력투쟁의 산물이라는 설이 지배적이었는데 이러한 통설이 바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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