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이야기

수릉[추존 익종]

불dutl 2012. 5. 31. 15:12

<추존> 문  조[익 종]  1809년~1830년  자-덕인  호-경헌  휘-대  효명세자  묘호-문호

수릉[합장릉];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2-1 [동구릉]

 

 

순조와 순원왕후김씨 사이의 장자로 창덕궁 대조전에서 태어났다

1812년[순조12]왕세자에 책봉 되었으며 1819년 조만영의 딸을 맞아 가례를 올리고 헌종을 낳았다.

1827년[18세] 세자시절 대리청정을 하면서 인재를 널리 등용하고 형옥을 신중하게 하고 모든 백성을 위한 정책 구현에 노력 하였으나 대리청정 4년만에 1830년[순조30]5월6일 창덕궁 희정당에서 22세의 젊은나이로 숨을 거두었다.같은해 8월4일 석관동 경종무덤 좌측에 무덤 만들어 연경묘라 했다가 1846년 풍수상 불길하다하여 양주 용마산 아래로 옮겼다.그후 1855년 철종때 다시 건원릉 좌측으로 옮겨졌다.

헌종 즉위후 부왕인 문조를 익종으로 추존했다.대한제국 출범한뒤에 고종에 의해 다시 문조 의황제로 추존됐다.

 

효명세자는 다재다능 했고 예술을 잘 이해했으며 짧은 기간이지만 단호하고 개혁적인 정치를 펼쳤다.

정재[궁중무용]를 집대성 하는데 큰공헌을 했다.봄 꾀꼬리가 노니는 것을보고 창작했다는 춘앵전,모란꽃을 들고 추는 대표적인 궁중무용 가인전 목단,고구려무,향령무,장생보연지무등 정재를 집대성했다

1800년 병환중에 있던 정조는 죽기 보름전인 6월14일 김조순에게 적극적인 정치개입을 비밀리에 요청했다.정조 사후 5년간 정순왕후 수렴청정이 거둬지자 김조순은 정권을 장악하고 정조의 꿈과 비원을 외면해 버린채 이후 60년간 안동김씨가 정국을 좌우했다.순조는 15세에 친정을 시작했지만 허수아비 왕이었으며 마음약하고 착하기만해서 물러빠진 순조는 안동김씨를 제압할 정치력이 없는데다 세도정치로 인한 민란과 수차례 천재지변을 수습할 능력이 없어 정사에 흥미를 잃었다.

순조가 몇년간 정사를 돌보지 않다가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켰다.효명세자는 총명했던 군주 정조를 빼닮았고 할아버지 정조를 정치의 이상으로 삼았다.철저하게 안동김씨를 배척하고 소외당했던 소론과 남인,북인을 등용했다.대리청정 초반에 기존대신 세력인 삼사의 길들이기에도 눈하나 깜빡 안하고 맞서 처리하는 단호함을 보여 강력한 왕권을 회복 시키려는 의지를 굳혔다.젊은 인재들을 등용하고 개혁정치를 펼치려 했으며 창덕궁 후원에 기오헌과 의두각을 짓고 책을 많이 읽었으며 여기와서 정조를 생각하며 난국을 타개할 정책에 골몰했다.12권6책으로 구성된 경헌집6권과 학석집등 문집을 남겼다.

기오헌과 의두각 뒤에 규장각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 * *신  정  왕  후* * *1808년~1890년

본관 풍양  풍은부원군 조만영의 딸이다

1819년[순조19]세자빈에 책봉되고 1834년 아들 헌종이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다.

신정왕후는 83세까지 천수를 누리면서 조선후기의 정국을 좌지우지한 여장부였다

아들 헌종이 왕통을 이어받아 남편이 익종으로 추대되자 왕대비에 올랐고 후사없이 승하한 철종 뒤에는 대왕대비가 되어 왕실의 권한을 한손에 거머쥐었다.신정왕후 조씨는 안동김씨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대원군과 손잡고 고종을 즉위시키고 조대비가 되어 수렴청정을 하였다

1890년[고종27]4월17일 경복궁 흥복전에서 숨져 같은해 8월30일 익종과 합장했다

신정왕후는 왕후는 못했지만 그대신 대비,대왕대비를 거치며 70년이상 왕실에서 최고대접을 받고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