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릉[정조]
<제22대> 정 조 1752년~1800년 산 재위;1776년~1800년6월[24년3개월]
건릉[합장릉]: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융건릉]
정조는 사도세자와 혜경궁홍씨 사이에서 영조28년[1752]9월22일 출생 하였고 요절한 의소세손의 뒤를이어 영조35년[1759] 왕세손에 책봉 되었다.영조51년[1775] 조부인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했고 이듬해인 1776년 승하한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정조는 즉위 하자마자 자신은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천명하고 아버지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노력을 다했다.문무를 겸비했던 정조는 규장각을 두어 학문 연구에 힘쓰고 장용영을 설치하고 수원에 화성을 쌓는등 조선의 중흥을 이끌었다.또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여 붕당정치의 폐해를 막기위해 힘썼으며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위해 화성[지금의 수원]으로 수도를 옮기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무엇보다 지극한 효성은 백성들로부터 추앙을 받았다.24년3개월동안 재위한후 1800년6월28일 창경궁 영춘헌에서 승하했다.효의왕후와의 사이에는 자손을 남기지 못했고 4명의 후궁에게서 총2남3녀의 자손을 두었으나 왕위를 이은 순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요절했다.
* * *효 의 왕 후* * *1753년~1821년
본관 청풍 좌참찬 김시묵의 딸이고 어머니는 남양 홍씨이다.
영조29년[1753]12월 3일 가회방 사저에서 출생하여 영조38년[1762] 10세의 나이로 세손비로 책봉되어 왕세손이던 정조와 가례를 올렸으며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잘 섬겨 영조의 총애를 받았다
1776년 정조 즉위후 왕비로 책봉 되었고 슬하에 소생이 없어 1790년[정조14] 수빈박씨가 아들을 낳자 왕세자로 삼았다.천성이 공손하고 온후하여 60세가 넘어서도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와 혜경궁 홍씨를 공양하여 칭송을 받았다.일생을 검소하게 지냈으며 수차에 걸쳐 존호가 올려 졌으나 모두 거절하였고
1820년[순조20] 68세가 되어 여러 대신들이 하수연을 베풀고자 했으나 사양하였다
효의왕후는 정조 승하후에도 21년을 더 살다가 순조21년[1821]3월9일 69세로 승하하였다.
능호를 정릉이라 했다가 건릉에 합장되면서 능호를 따로 쓰지않았다.
건릉은 사도세자의 헌륭원 동쪽 구릉에 있던것을 서쪽 구릉으로 이장하면서 효의왕후와 합장 한것이다
~고종은 사도세자의 융릉과 정조의 건릉에 특별히 신경을 썼는데 이는 고종이 사도세자의 직계 후손이기 때문이다.사도세자의 서2남이자 정조의 배다른 동생인 은신군-남연군[고종의조부]-흥선대원군[고종의생부]으로 종통을 이어 받았다.
건릉은 처음 조성 되었을 당시 현재의 자리가 아니었다.순조21년[1821] 효의왕후 김씨가 승하하자 애초의 건릉 자리가 흉당이라는 의견들이 분분 하였던것을 마음에 걸려한 순조가 건릉 천장과 효의왕후 합장을 동시에 추진했다. 천장지로 인조의 장릉 재실 뒤쪽과 융릉 우측 옛 수원부 향교 자리가 거론 되었는데 파주에 위치한 장릉쪽은 아무리 자리가 좋다 하여도 부친의 곁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을것 같아 수원부 향교 자리에 건릉을 천장 하였다.건릉을 현재의 자리로 천장하게 된데에는 김조순의 주장이 결정적인 역활을 하였다.김조순은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신하로서 순조비 순원왕후 김씨의 부친이기도 하다
또한 그의 후손들이 조선 후기 안동김씨 세도정치로 나라를 거의 말아 먹다시피 했다
정조는 재위기간 내내 검소한 삶을 몸소 실천했던 군주였다.의,식,주 모든면에 있어서 한치의 낭비조차 허용하지 않았던 정조는 또한 백성들의 삶을 돌봄에 있어서도 어느왕 보다도 열정적으로 임했다.
역사의 기록에 나타난 객관적인 면면들만 보아도 정조가 분명 조선의 르네쌍스를 이끌었던 군주임은 틀림없다.부친을 죽음으로 내몬 노론벽파라는 수구세력들의 극심한 견제에 시달리며 간신히 왕위에 올랐으나 끊임없는 반대파들의 암살위협에 시달리며 밤잠을 설쳐야 했던 군주,나라에서 가장 학식이 깊다는 신하들조차 감히 맞대응 하지 못했던 학자 군주,그리고 요절한 부친에 대한 애끓는 그리움을 평생 간직하며
살아간 효자군주
.....정조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노래함......
운기 우개 펄럭 펄럭 세상 먼시 터는 걸까
홍화문 앞에다 조장을 차리었네
열두전거에다 차린 우상 말이
일시에 머리들어 서쪽을 향하고 있네
영구 수레가 밤 되어 노량 사장 도착하니
일천개 등촉들이 강사 장막 에워싸네
단청 한 배 붉은 난간은 어제와 똑같은데
님의 넋은 어느새 우회관으로 가셨을까
천줄기 흐르는 눈물 의상에 가득하고
바람속 은하수도 슬픔에 잠겼어라
성궐은 옛모습 그대로 있건만은
서향각 배알을 각지기가 못하게 하네
-다산 정약용-다산 시문집 제4권
~ ~ ~의빈 성씨~ ~ ~
정조의 후궁으로 장남 문효세자의 생모이다 {서삼릉 후궁묘역}
본관 창녕,아버지는 증찬성 성윤우이고 어머니는 증정경부인 임씨이다.
정조의 다른 후궁들은 간택되어 들어온 후궁이나 의빈성씨는 궁녀출신의 승은 후궁이다.화빈윤씨 처소의 궁인이었다는 설이 있으나 근거는 없다.정조5년[1781]정조의 승은을 입고 상의[특별상궁]가 되었다
의빈성씨가 문효세자를 낳기 전까지 정식첩지를 받지않고 특별상궁의 신분으로 머물렀던것은 임신을 하지않은 궁인을 후궁으로 책봉하지 말라는 어명을 내린 정조가 당쟁에서 의빈성씨를 보호하기 위한 처사였다
1782년[정조6]음력9월7일 궁인신분으로 왕자를 낳아 내명부 정3품 소용이 되었다.11월27일에는 아들이 원자 칭호를 받았고 이듬해 2월에는 본인도 승격되어 정1품 의빈이 되었다.원자는 1784년[정조8]정식으로 왕세자로 책봉되었다.1784년[정조8]윤3월20일에 딸을 낳았지만 첫돌을 넘기기도 전에 잃었다
1786년[정조10]음력5월11일 문효세자가 죽었고 같은해9월 14일 의빈도 세번째 출산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사망했다.이에 정조는 그녀의 상제를 영빈이씨[영조후궁] 장례의 예를따라 1등 후궁의 예로 치러주었다.같은해에 죽은 문효세자와 함께 효창묘[고종7년 효창원으로 승격 현효창공원]에 묻혀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강제이장되어 지금은 서삼릉의 후궁묘역에 묻혀있다.
정조는 문효세자와 의빈성씨 무덤에 각각 죽음을 애도하는 '어제 신도비'를 내렸는데 현재 모두 서삼릉에 옮겨져있다. 집안이 한미하고 당파가 없던 의빈성씨는 정조가 유일하게 마음에 둬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승은 후궁이었다.원빈홍씨를 비롯해 화빈윤씨,수빈박씨등은 노론일파 유력가문의 딸들이었다.
의빈성씨는 성품이 곱고 욕심이 없었으며 정조의 자녀 절반이 그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났을 정도로 정조가 많은 애정을 쏟았다고 전해진다
유독 자식복이 없었던 정조에게 의빈성씨의 몸에서 첫아들을 얻게된것은 이루말할수없는 기쁨이었고 왕자탄생을 기념하는 대규모 별시가 실시되고 이른 세자책봉 논의가 이뤄지는등 문효세자는 정조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그렇게 아무탈없이 잘 자라던 문효세자는 5살의 어린나이에 갑자기 죽어버린다.홍역에 걸렸다가 완쾌돼 가던중 갑자기 병이 악화되어 사망한것이다.앞서 어린 옹주를 잃고 당시 임신5개월의 몸이었던 의빈성씨에게 연이은 자식들의 죽음은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다.그런 심적 고통 때문인지 그로부터 몇개월후 의빈성씨마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다.정조는 "의빈의 병이 이상하더니 결국 이지경에 이르고 말았다.더이상 의탁할곳이 없다"며 깊은 슬픔에 잠기고 20여일 동안 정사를 돌보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정순왕후는 기다렸다는듯이 의빈,문효세자,의빈의딸 옹주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독살설을 제기하며 진짜 역적을 찾아내야 한다는 한글 교서를 내렸다.
정순왕후가 제기한 의문투성이 역모사건에 대한 정조의 반응은 분노에 가까웠고 정순왕후의 뜻과 반대로 정조는 오히려 사태를 축소 시키려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때문에 항간에는 정순왕후가 이들의 죽음과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떠돌았다.실록에는 의빈성씨의 죽음에 대해 세간에 의혹이 많았다는 점이 기록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