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릉[영조]
<제21대> 영 조 1694년~1776년 금 연잉군 재위;1724년8월~1776년3월[51년7개월]
원릉[쌍릉]: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2-1 [동구릉]
1724년 즉위한 영조는 조선의 역대 임금중 재위기간이 가장긴[52년]왕으로 탕평책을 써서 당쟁의 근절에 힘을 기울였을뿐 아니라 균역법을 시행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 주었다
그러나 자신은 붕당정치의 폐해 속에서 살아남았지만 아들 사도세자는 붕당정치의 희생자가 되는 비운을 겪었다.청계천을 준설하고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고 재위 25년째 이후 50여회나 궁성을 나와 거리 행차를 하였으며 1773년에는 경희궁 건명문에 신문고를 달게 하였다
영조는 서오릉의 홍릉[원비 정성왕후]을 자신의 자리로 정해 쌍릉을 조성 하기를 바랐으나 손자인 정조는 지금의 건원릉 두번째 산줄기에 안장하고 원릉이라 했다.6명의부인과 2남12녀의 자녀를 두었다
숙종은 세자였던 경종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경종이 허약한데다 장희빈의 소생이기 때문에 자연스레 연잉군과 연령군에게 눈길이 쏠렸다.급기야 승하하기 3년전 좌의정 이이명과 독대 연잉군에게 세자 대리청정을 맡긴다고 결정 지었다.그러나 그결정은 실행 되지 못했고 경종이 왕위에 올랐으나 재위기간 내내 자신을 지지하는 소론 세력과 연잉군을 지지하는 노론 세력들에 의해 당쟁에 시달렸다
경종2년[1722] 임인옥사가 발생 하였고 노론 세력들이 대거 숙청 되었다.그와중에 왕세제였던 영조가 시해 세력의 수괴라는 소문이 떠돌아 목숨마저 위태로운 상황이 되었다.
인원왕후에게 목숨만 살려달라 애원했고 인원왕후가 경종을 움직여 무사할수 있었다.조선시대 최장수 왕으로 군림 했지만 그런 일들을 겪어내고 왕위에 오른 영조는 언제나 철저한 보신책을 사용해 오랫동안 왕의자리를 보존할수 있었다.영조는 최장수 임금이었던 만큼 생전에 8회에 걸쳐 산릉원을 조영 하거나,천장해 능제에 관심이 많았다.숙종의 교명을 근거로 제도를 정비하여 국조상례보편을 펴냈다.
따라서 원릉의 석물 제도는 새로 정비된 국조상례보편의 표본과 같다
역사상 충신들에 대한 추존 사업과 왕조의 시조묘,조경묘[전주] 건립,측우기 설치등의 업적을 남겼다
* * *계비 정 순 왕 후* * *1745년~1805년
본관 경주 오흥부원군 김한구의 딸 정식 칭호는 예순 성철 장희 혜휘 익렬 명선수경 광헌 융인 소숙 정헌 정순왕후 김씨이며 정순이 시호이다
영조 원비 정성왕후가 죽자 1759년[영조35] 15세의 나이로 66세의 영조와 혼인하여 왕비로 책봉 되었다
친정이 노론의 핵심 가문이었음에 비해 사도세자는 소론에 기울어져 노론에 비판적 이었고 그 내외가 어머니뻘인 자기보다 10세나 연상인데서 빚어지는 갈등 때문에 1762년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데 적지 않은 역활을 했다고 전해진다.오빠 김귀주가 이끄는 세력이 영조 말년에 사도세자의 장인인 홍봉한 중심세력과 맞서고 친정 인물들을 중심으로 하는 벽파가 정조대의 시파와 대립 하는데 중요한 정치적 배경이 되었다.1800년 순조가 11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신료들의 요청을 받아 들이는 형식으로 수렴청정을 실시 하였는데 스스로 여자 국왕을 칭하고 신하들도 그의 신하임을 공헌 하는등 실질적으로 국왕의 모든 권한과 권위를 행사 하였다.과감하게 국정을 주도하며 조정의 주요 신하들로 부터 개인별 충성서약을 받았으며 정조의 장례가 끝나자 마자 사도세자에게 동정적이었던 시파 인물들을 대대적으로 숙청 하였다
이에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 인과 정조의 친모 혜경궁 홍씨의 동생인 홍낙임등은 처형 되었다
다음해에는 격렬한 천주교 탄압을 일으켜 정약용등의 남인들을 축출하고 국왕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혁파 하는등 정조가 수립한 정치 질서를 부정 하였다.이러한 정책들은 친정 인물인 김관주,김일주,김용주및 영의정 심환지등이 뒷받침 하였다.일반 국정에서는 민생 문제의 해결을 위해 비변사,관찰사,수령으로 이어지는 통치 질서의 확립을 강조 하였다.그러나 시파 김조순이 벽파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정조의 결정대로 딸을 순조의 비로 들여 국왕의 장인이 된 상황에서 1803년12월에 수렴청정을 그치게 되자 정세가 바뀌어 벽파가 조정에서 숙청되고 친정인물들도 대부분 도태 되었다.1805년1월 61세로 소생없이 세상을 떠났다
~ 홍재전서엔 정조가 원릉에 친히 올린 제문이 여러편 있다.그중 정조11년[1781]의 것을 옮겨본다
원릉에 친히 드리는 제믄
성조께서 승하 하심이 지금 열두해가 되었는데
자애로 보살피신 융성한 은혜가 더욱 멀어져 쫒을수 없나이다
나라에 경사가 있어 어린아이가 부모를 사모 하는듯한 심정 더욱 새로우니
더구나 이 비탄하고 원통스러운 일에 있어서야 어찌 하늘에 부르짖지 않을수 있으리이까
면면이 이어져 오던 종묘 사직이 실오라기 처럼 위태한 지경 이었으니 소자가 누구를 믿으리이까
영령이여 오르내리며 임하소서
나라의 터전과 운명을 길이 유지함은 장차 성조의 보살핌을 입으리니
능묘 둘레의 측백나무를 잡고 눈물을 흘리며 경건히 술과 안주를 받치나이다
-홍재전서 제21권 제문3-
~~~원 릉 만 사~~~
횃불이 궁중길에 늘어 섰을제 상여가 대궐 도랑 건너 가누나
산 봉우리 멍하게 혼자 서있고 강물은 목이 메어 흐르질 못해
덕택은 궁한 백성 흠뻑 끼치고 신선생활 능침으로 돌아 가셨네
오호라,진정으로 영주 이시니 계책 업적 천추에 길이 비추리
-정 약용- 다산 시문집제1권 수록작
* * *원비 정 성 왕 후* * *1692년~1757년
홍릉: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산30-1 [서오릉]
달성부원군 서종제의 딸로 1692년[숙종18]에 태어났다.1704년[숙종30] 연잉군과 혼인하여 달성군부인으로 책봉 되었고 1721년[경종1] 연잉군이 왕세제에 책봉됨에 따라 세자빈이 되었다
1724년 영조 즉위후 왕비로 책봉 되었으며 이때 영조 나이31세 정성왕후 나이 33세였다
정성왕후는 당쟁으로 인해 어지러운 정국 속에서 소생까지 없었으나 후궁 정빈이씨가 낳은 경의군을 친자식처럼 아꼈으며 그가 10세에 돌연사 하자 그배후를 밝혀내기 위해 내사 하였다.
2년후 그배후가 경종의 비 선의왕후임을 밝혀내고 이에 관련된 나인들을 일벌백계하고 선의왕후를 처소에 유폐 시키기도 하였다.이후 후궁 영빈이씨 소생의 사도세자[장헌세자]와 영조 사이의 갈등을 풀기위해 노심 초사 하던중 병을 얻어 창덕궁 관리합에서 66세로 승하 하였다
왕궁 생활 43년 동안 항상 웃는 얼굴로 맞아주고 양 전[인경왕후,선의왕후]을 극진히 모시고 게으른 빛이 없었으며 숙빈최씨[영조생모]의 신주를 모신 육상궁 제전에 기울였던 정성을 고맙게 여긴다고 정성왕후 행장에 영조가 적고있다.
영조는 정성왕후 승하한지 2년후 66세의 나이로 15세였던 정순왕후를 계비로 맞았으나 사후에는 조강지처 정성왕후 곁에 묻힐것이니 그자리를 엄숙히 정해두고 상설도 그에따라 조성하라고 지시했다
좌측에 정성왕후능이 자리하고 있고 영조가 미리 잡아 놓았던 우측은 비어있어 영원히 우허제로 남은 유일무이한 조선왕릉이다.정조는 할아버지 영조가 가고싶은 홍릉에 안장시킬 생각이 없었고 효종의 영릉을 천장한 자리,즉 파묘 자리는 일반인들조차 쓰지 않는데 그런곳에 대행 왕의 능을 쓴것은 정조의 사무침이 낳은 결과로 아무리 선왕이고 친할아버지여서 왕세자 시절 갖은 효성을 다받쳤어도 정조는 왕위에 오를때까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간 장본인인 영조에 대한 반감을 가슴속에 묻어두고 있었고 홍릉 우측을 영원히 비워두는 것으로 그한을 드러내 보였다.
홍릉 비각-"조선국 정성왕후 홍릉" 정조9년[1785] 정조의 어필로 조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