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묘
제15대 <광 해 군> 1575년~1641년, 혼, 재위;1608년2월~1623년3월{15년1개월}
광해군,문성군부인 유씨 묘역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 산 59번지 영락동산 공원묘지내
광해군은 선조와 공빈김씨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어났다.임진왜란때 국난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피난지 평양에서 세자에 책봉 되었다.선조 말년에 계비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을 낳음으로서 권력의 암투가 벌어졌다.선조는 적자인 영창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었으나 승하하기 직전 영창대군 나이 겨우 2세였다
할수없이 형제간의 우애를 돈독히 하라는 당부와 함께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 주었다.
1608년 즉위한 광해군은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국토와 문화재 복구 사업에 전념했다
창덕궁등 궁궐 증수,민생안전을 위해 대동법을 실시 했으며 특히 당시의 국제 정세를 적극적으로 이용한 북방 외교 정책은 광해군 최고의 치적이다.한편으론 형 임해군과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유배후 살해하고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 시키는 등의 실정으로 반정의 싹을 키웠다.
특히,영창대군을 방안에 가둔채 불을 때 질식사 시킨일은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에 충분했다.
1623년 광해군의 폐위를 논의하고 칼을 씻었다는 세검정의 유래를 낳았던 능양군[인조]을 포함한 반정군은 광해군을 폐위하여 강화도로 유배시키고 인목대비의 윤허를 받아 왕위에 올라 반정을 성공 시켰다
제주도로 유배지가 옮겨진 광해군은 그곳에서 67세의 천수를 다했다.광해군은 자신이 죽으면 어머니 발치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그때문에 1643년 제주도에서 지금의 묘소로 옮겨졌으며 건너다 보이는곳에 어머니 묘소인 성묘가 자리한다.오늘날 광해군의 공과는 양면적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붕당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된 측면이 있다.광해군은 자신을 몰아낸 인조가 왕위에 군림하고도 19년이나 지나서야 굴곡많은 삶을 마감했다. 10명의 부인 에게서 1남1녀를 두었다
<문성군부인 유씨> 1576년~1623년
아버지-유자신, 1623년 유배생활 1년7개월 만에 사망했다. 48세때
부는 바람 뿌리는 비 성문옆 지나는 길
후덥지근 장독 기운 백척으로 솟은 누각
청해의 파도 속에 날은 이미 어스름
푸른 산의 슬픈 빛은 싸늘한 가을 기운
가고 싶어 왕손초를 신물나게 보았고
나그네 꿈 자주도 제자주에 깨이네
고국의 존망은 소식 조차 끊어지고
연기 깔린 강물결 외딴배에 누웠구나
-광해가 강화도 교동에서 제주로 옮겨 갈때 지은시-